1.

자크 라캉은 "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라캉의 이 말보다 '콩깍지'를 완벽하게 정의한 다른 말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진 이는 눈이 먼다. 연인을 이상화하고, 그(또는 그녀)와 같은 이는 세상에 또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 그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연인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 대상 a"에 가깝다. 우리가 연인을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때문에 연인은 종종 원인모를 분노를 표출하고 공포심을 주는 불가해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2.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의 주인공 톰(조셉 고든-래빗)은 사랑의 영속성을 믿는 순진한 사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이라는 외상을 입은 그는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에게 맞는 일생일대의 '짝'이 존재한다고, 그녀와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느날 이 총각 앞에 썸머(주이 데샤넬)라는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난다. 같은 회사에 새로 비서로 온 썸머의 사랑관은 톰과는 정반대다. 역시 어린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톰과는 반대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일 뿐이라고 믿는다. 둘이 사귀게 되는 건 우연이지만, 관계에서 썸머가 우위에 놓이는 건 필연이다.

 

상대적 약자인 톰은 초보적인 -그래서 순수한- 연인의 전형이다. 그에게는 썸머가 세상에 하나뿐인, 아주 특별한 여자다. 실제로 썸머가 별난 여자인 사실이지만(공원에서 '페니스!'를 큰 소리로 외치기 등), 톰에게 있어 썸머의 대상 a는 그의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될 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그는 어찌나 썸머를 특별하게 여기는지, 그녀가 제안한 '사귀기는 하지만 연애는 아니다'는 식의 모호한 관계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의 사이가 친구 이상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관철해야 할 시점에서도,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주저한다(그래서 그녀를 잃는다). 썸머가 관계의 종결을 선언한 뒤, 톰의 인생이 망가지는 건 당연한 이치. 여동생은 '세상은 넓고 고기는 많다'며 톰을 위로하지만, 그에게 있어 여름(썸머)의 끝은 세상의 끝과 같다.

 

반면 썸머는 라캉의 명제에 대한 독특한 전회를 보여준다. '사랑은 없다'고 믿는 썸머는 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내내 인정하지 않는다. 썸머가 자신의 감정에 굴복하는 건 사실상 톰과의 관계가 (거의)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서이다. 그녀는 자신이 톰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만(그리고 사이가 사랑임을 인정하게 되지만), 톰은 그 결정적인 순간을 놓친다. 프로포즈 대신 핫케잌 드립. 썸머는 톰에게 '미래'를 원하지만, 톰은 그걸 제시하는데 실패한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톰과 썸머가 연애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이다. 사랑도 끝나고 서로는 제 갈길을 가지만, 대상 a는 연인들의 존재를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하고 움직이게 한다. 모든게 예전 그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그대로인 것은 없다. 썸머는 믿지 않았던 사랑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게 톰과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즉 썸머가 사랑의 실재를 깨닫는 순간은,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과 겹쳐진다. 썸머가 이끌리는 대상 a는 톰과의 관계가 진행중일 때가 아니라, 다 끝나고 난 뒤 사후적으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한편 톰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카드 문구 제작)을 그만두고, 썸머의 권유대로 전공(건축)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여름'이 끝나도 세상이 끝장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왜냐. 500일의 여름이 지난 뒤, 그에게 가을(Autumn)이 찾아오기 때문. 사랑은 새로 시작되고, 인생은 계속된다. 언젠가는 그 가을도 끝날지 모르지만, 이 중요한 사실을 배운 덕분에 앞으로 그의 계절들은 훨씬 견딜만한 것이 될 것이다.

 

 

3.

감독인 마크 웹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다운 재기발랄한 연출을 보여준다. 뮤지컬, 베리만 패러디, 애니메이션 합성, 드 팔마식 화면 분할 등 온갖 테크닉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특히 500일의 기간을 자유자재로 순서를 뒤섞고, 연애가 한창일 때와 깨지고 뒤를 이어붙이는 식의 편집도 재치가 넘친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계기가 스미스의 곡을 비롯해, 레지나 스펙터, 도브스 등으로 이뤄진 사운드트랙도 감독의 출신을 보여주는 대목.

 

연출과 편집의 덕을 상당부분 보기는 했지만,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본 역시 [500일의 썸머]에서 뛰어난 부분이다. 이 각본의 예민하고 냉정한 현실 감각과 위트있는 대사는 한 미국 평론가의 말처럼 "새로운 세대의 [애니홀]"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호감을 갖게 하는 건, 주인공을 맡은 젊은 두 배우의 개인적인 매력이다. '동네-옆집-총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조셉 고든-래빗은 귀엽고, 주이 데샤넬은 4차원적으로 신비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주인공 톰의 '썸머 효과' 주장이 정말로 여겨질 만큼.

 

부연. 양키스 유격수 데릭 지터의 애인인 민카 켈리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Rating ****